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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각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by 영원파란 2014.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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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이 비는 신라 진흥왕(540~576)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신사년(辛巳年) 21일에 세웠다.

과인(寡人)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일의 끝에 사방(四方)으로 널리 이익(利益)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除去)하여 토지(土地)와 강토(疆土)와 산림(山林)대등(大等)과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외촌주(外村主)는 살핀다. 고로 해주(海州)의 전답(田畓)□□와 산림과 하천은 비록 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상대등(上大等)과 고나말전(古奈末典), 법선(法選)과 상() 이로써 몸이 벌을 받는다.

이때 □□(□□)□□□□□(□□□□□) 갈문왕(葛文王)이고, □□□□(□□□□)는 한지□□(漢只□□)의 굴진지(?) 대일벌간(大一伐干)이고, ()□□(□□) 일벌간(一伐干)이고, □□절부지(□□折夫智) 일척간(一尺干)이고, □□□□(□□□□) 일척간(一尺干)이고, ()□□부지(□□夫智) 잡간(?)이고, 사탁(沙喙)의 무력지(武力智) 잡간(?)이고, ()의 소리부지(小里夫智) □□(□□)이고, 사탁(沙喙)의 도설지(都設智)사척간(沙尺干)이고, 사탁(沙喙)의 벌부지(伐夫智) 일길간(一吉干)이고, 사탁(沙喙)의 홀리지(忽利智) □□(□□), 진리차공(珍利次公) 사척간(沙尺干)이고, ()의 이망지(?亡智) 사척(沙尺)이고, ()의 소술지(所述智) 사척간(沙尺干)이고, ()□□□□ 사척간(沙尺干)이고, ()의 비협□□(?□□) 사척간(沙尺干)이고, 본피(本彼)의 말() 급척간(及尺干)이고, ()□□(□□) □□□이고, 사탁(沙喙)의 도하지(刀下智) 급척간(及尺干)이고, 사탁(沙喙)□□(□□) 급척간(及尺干)이고, ()의 봉안지(鳳安智) □□□이다. □□(□□)은 탁()의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부지(□□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탁(沙喙)의 감력지(甘力智) □□(□□)이다. 대등(大等)은 탁()의 말득지(末得智) 척간(尺干), 사탁(沙喙)의 칠총지(七聰智) 급척간(及尺干)이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서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는 사탁(沙喙)의 등□□(□□) 사척간(沙尺干)이고, 한성군주(漢城軍主)는 탁()의 죽부지(竹夫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는 탁()의 복등지(福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다. 상주(上州)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숙흔지(宿欣智) 급척간(及尺干), ()의 차질지(次叱智) 나말(奈末)이다. 하주(下州) 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춘부지(春夫智)대나말(大奈末), ()의 취순지(就舜智) 대사(大舍)이다. 우추실□□서아군(于抽悉□□西阿郡) 사대등(使大等)은 탁()의 북시지(北尸智) 대나말(大奈末), 사탁(沙喙)의 수정부지(?夫智) ()이다. 위인(爲人)은 탁()의 덕문형(德文兄) 나말(奈末)이다. 비자벌정(比子伐停) 조인(助人)은 탁()의 멱살지(覓薩智) 대나말(大奈末)이다. 서인(書人)은 사탁(沙喙)의 도지(導智) 대사(大舍)이다. 촌주(村主)는 망총지(?聰智) 술간(述干),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이다.

 

 

 

 

 

 

비각에서 내려다본 만옥정공원.

 

 

비각에서 바라본 화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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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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