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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각1076

대구올레 팔공올레 제3코스(5) -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오후 1시 9분. 급행1번 버스정류장 맞은편 풍경. 오늘 올레길은 여기서 끝납니다. 2011. 8. 22.
대구올레 팔공올레 제3코스(4) - 부인사, 수태골 2011. 8. 22.
유형문화재 신무동 마애불좌상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신무동 마애불좌상(新武洞 磨崖佛坐像).* 소재지 : 대구 동구 신무동 235-7- - -부인사계곡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불상은 지상에 노출된 큰 바위 위에 돋을새김한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길쭉한 얼굴은 풍만감을 주고 있다. 어깨는 당당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경직된 모습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손은 오른손을 위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위와 아래를 향한 연꽃을 새겼는데, 위를 향한 연꽃 속에는 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선으로 구별하고 있는데, 머리광배에는 고사리무늬를 새기고 가장자.. 2011. 8. 22.
대구올레 팔공올레 제3코스(3) - 신무동 오전 11시 56분. 신무동 입구 표지석. 신무교. 신무마을회관. 천불사. 천년암. 수법사. 오후 12시 11분. 신무동 마애불좌상 입구 안내판. 2011. 8. 22.
대구올레 팔공올레 제3코스(2) 팔공1번 시내버스만 다닙니다. 오전 11시 33분. 지난번에는 오른쪽 길로 내려왔었는데, 이번에는 왼쪽 길로 올라갑니다. 夫仁洞洞約公田碑. 권13의 뒷부분은 箴(2), 銘(2), 祝文(9), 祭文(16), 碑碣(3), 行狀(2)이다. 箴은 , 이고, 銘은 廣居庵, 孝悌堂에 대한 것이고, 祝文은 報本齋가 완성되어 別廟에 고한 告文, 병들고 쇠하여 家政을 손자에게 전해준다고 가묘에 고한 告文 등이다. 祭文은 장인 孫命大, 姑夫이자 스승인 李柱嵩, 大山 李象靖, 여러 族叔, 族弟, 從子들에 대한 것이다. 碑碣은 井田法을 본떠 夫仁洞에 公田을 세우고 백성들의 稅役을 충당하게 했다는 권13의 뒷부분은 잠(2), 명(2), 축문(9), 제문(16), 비갈(3), 행상(2)이다. 잠은 , 이고, 명은 광거암, 효제당.. 2011. 8. 22.
민속자료 용수동 당산 파노라마(클릭해 보세요) 2011. 8. 22.
대구올레 팔공올레 제3코스(1) - 미곡마을, 용수동 오늘은 지난번과 반대로 걸었습니다. 그래서 출발지는 미곡마을입구입니다.지난번 참조 http://blog.paran.com/ywm/38721354신무동마애불좌상은 예전부터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 오전 10시 48분. 미곡마을 표지석. 용수교. 달마사. 오전 11시 19분. 용수동 입구 표지석. 2011. 8. 22.
폭우, 소낙비 오전 내내 화창한 날씨이었는데, 오후 들어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갑자기 번개 천둥과 함께 굵은 소낙비가 내렸습니다. 2011. 8. 4.
[보물 제997호]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 보물 제997호.*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奉化 北枝里 石造半跏像).* 소재지 : 대구 북구 산격동 1370 경북대학교 박물관- - -북지리의 마애불좌상 옆에 있던 것을 1966년 경북대학교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 1.6m 가량에 상반신은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과 다른 돌로 만든 둥근 연꽃무늬 발받침대만이 남아 있지만,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상반신은 옷을 벗은 듯 하고 하체에 표현된 옷은 매우 얇다.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는 매우 크고 무릎을 높이 솟게 하여 강조하고 있다. 올려놓은 다리 밑에는 3단으로 옷주름이 부드럽게 흐르는데 그 선이 분명하다. 이들 옆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고리와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옷주름만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어 앞면.. 2011. 8. 4.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복제품) *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蔚珍 鳳坪里 新羅碑).* 소재지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 201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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