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조각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by 영원파란 2013. 11. 8.

AdSense@ywpop

[국보 제30]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분황사 주차장.

 

 

삼문과 매표소.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 일대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590~658)와 원효대사(617~686)가 주석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강고내말이 구리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구황동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분황사 종합안내도.

현재 출입은 삼문을 통해 하고 있으며, 매표소의 위치도 삼문 옆으로 이동되어 있습니다.

 

 

 

 

이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634)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사리함(舍利函)에는 여러 가지 구슬, 가위, ·은바늘과 은함, 숭령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이 들어있어, 고려 숙종(肅宗예종(睿宗) 연간에 해체·수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元曉大師)비의 받침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肅宗) 6(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 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비신을 받혔던 비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면에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 분황사 석정

 

이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 cm8,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체(四聖諦)를 뜻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원성왕(元聖王) 11(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이 불상은 보광전(寶光殿)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乾漆製 藥盒)의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九年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英祖) 50(1774)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으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의 사이에는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다.

  

대좌(臺座)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옛날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芬皇寺)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 cm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竿臺)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竿孔)을 설치하여 양 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皇龍寺)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반응형
그리드형(광고전용)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