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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각

대구 영영축성비, 대구부 수성비

by 영원파란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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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영영축성비, 대구부 수성비

 

 

 

 

영영축성비 (嶺營築城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90

 

이 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 과정을 기록하여 1737(영조13)에 세운 것이다. 성의 둘레는 총 2,124(),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女堞)819, 성 높이는 서남이 18(), 남북이 17, 뒤축대의 넓이가 7, 높이가 3()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때 비로소 돌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한다. 이 비는 원래 남문밖(嶺南第一關)에 세웠는데 1906(광무10) 당시 대구군수인 박중양(朴重陽)이 성을 헐어버렸고, 이 비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가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白常輝)가 썼다.

 

 

 

대구부 수성비 (大邱府 修城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90

 

이 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1870(고종7)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마쳤는데,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새로이 4개의 누각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定海樓), 서를 주승루(鑄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 하였다고 한다.

이 비는 본디 남문 밖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06(광무10)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다가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

그런 뒤 1980년 남문(嶺南第一關)을 다시 세우면서 비석도 이 자리로 옮겼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老)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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